추억, 고바우(하)

 

만화를 문화자산으로

   ‘똥치기만평의 사회적 파장은 대단했다. 사흘 경찰조사 끝에 아동교육에 유해했다며 약식 기소된 김성환은 450환 과료 처분을 받았다. 이에 일단의 기자들이 만화를 허위보도라니 이렇게 기가 막히는 게 어딨냐?”고 대들자 서울지방법원장 왈 판사 혼자서 2백 건을 처리하다보니 소홀히 된 거라며 겨우 꽁무니를 뺐다(한영주 채록,『김성환 1932-  』, 부천만화정보센터, 2009).

   고바우는 마침내 어떤 권력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위광이 되었다. 1980년 언론언론인 대학살 때 동아일보에서 잘랐다가, 그 칼날의 5공도 비판세력에 대한 관용의 상징으로 <고바우 영감>은 함께 가는 게 마땅하다고 개심했다. 덕분에 한 달 공백 끝에 새로 손을 내민 조선일보에서 연재가 재개되었다.

   왕년의 내 아이돌과 직접 마주친 것은 내가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를 오가던 1990년 전후였다. 대인관계에 소심한 위인인데도 그를 만나자 낯선 객지에서 아저씨를 만나듯 반가웠다. 그 사이 소문으로 들었던 우표수집 취미에 대해서도 직접 듣고 싶던 차 마침 언론계 선배들의 식사모임에 동석할 기회가 생겼다. 거기서 그림사랑이 서로 같다는 말이 오간 끝에 이후 광화문 동태찌개 집에서 종종 마주 앉았다.

   만화가 당신의 직업이 된 것은 타고난 미술 소질이 발단이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칭찬 받았음의 연장으로 호구책이 될까 싶어 그린 만화가 잡지에 실린 게 1949년이었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겨우 경복중학을 마친 어린 나이에 종군화가단에 들어가서 이등병 신세로 육군 정훈국 간행물에 만화를 그렸다.

   그림사랑을 근저로 그리고 종군 화가들을 많이 만났던 인연으로 빠져든 취미가 까세(cachet)’ 수집이었다. 그에게서 처음 들었던 프랑스 말 까세는 “20세기 이전 유럽에서 편지를 보낼 때 봉투를 접고 그 접은 곳에 풀 대신 밀랍, 파라핀 등을 떨뜨려 봉인하던 방식, 요즘은 특히 우표 수집가 사이엔 우표와 연관된 그림을 봉투에 그린 것을 뜻한다 했다.

   당신이 모은 까세, 그리고 그 수집 이야기를 담아 고바우는 단행본(『나의 육필까세집』, 인디북, 2005)을 냈다. 책에 무려 111인 화가의 까세를 실었으니 마니아의 치열한 열정은 알아줄만 했다,  현대화단 동시대 미술인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될 화가가 더 있다고 들먹이자, 그건 연락 방도를 못 찾았음 탓이라 했다. ‘설악산 화가김종학과 추상화가 오수환이 수집목록에 든 데는 내가 중간다리였다.

 

스웨덴 국제우표전(1966)에서 그랑프리

   까세가 우정의 파생 장르임이 암시하듯, 고바우는 세계적으로 소문난 우표수집가, 곧 우취(philately) 사람이다. 15만 장 우표 수장보다 한말에 나온 우표가 봉투채로 세계에 남은 게 27,8통뿐인데 그가 무려 15통 이상을 갖고 있어서다.

   우표수집 취미는 나라 구실을 하려면 우표 정도는 발행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정권이 세계역사상 1천개가 넘는다, 우표는 그 나라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구체적 물증인 까닭에 지구상에 명멸한 나라에 대한 공부가 된다고도 했다(비에른 베르예, 『오래된 우표, 사라진 나라들』, 흐름출판, 2019). 이 말대로 우표는 세계 역사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한 것.

   그리고 우취는 골동 취미의 일종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도 고바우가 역사 고증의 취미에 빠졌을 만 했다. 기실, 시사만평의 대사 짧은 한 마디를 적기까지 수많은 독서에다 거기서 얻은 지식의 응용인 고증이 만화제작의 필수 요소였다. 일제 때 한국인 재벌이 16세기 인물 이순신의 일대기로 병풍으로 만들게 했는데 거기에 등장한 거북선 위엔 19세기말에 태어난 태극기가 그려졌음이 엉터리 고증의 극치라고 꼬집기도 했다.

   내가 어린 날 읽었던 <거꾸리군 장다리군> 연재만화의 한 줄거리도 20대 중반 고바우의 한국사 공부의 한 여택이 분명했다. 임란 때 명신 오성 이항복의 어린 날 일화로, “오성 집 감나무의 큰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졌고 거기에 열린 감은 권율 집 하인이 따갔다. 분개한 오성이 권율의 방문에다 주먹을 찔러 넣고 이게 누구 주먹이오? 묻자,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것이겠느냐?! 응답한다. 그럼 하인이 따간 감은 누구 것이냐?고 짐짓 준엄하게 따졌다는 이야기였다. 갓 중학에 들었던 내가 교과서 바깥에서 처음 만났던 역사 단편이었다.

 

시사만평, 막 내리다

   <고바우 영감>은 조선일보를 거쳐 문화일보에서 2009929일자 14,139회로 끝났다. 일요일 등 신문이 나오지 않았던 날을 빼면 무려 45년이나 연재되었다는 계산이었다.

   이후 고바우는 자락의 회화작업에 열중했다. 1961년에 국립도서관에서 제 1회 개인전을 연 이래 나도 발문(김형국, “고바우 김성환: 시사만화가에서 풍속화가까지,” 『그 시절 그 모습』, 인사아트센터, 2010)을 적기까지 했던 개인전은 12회째였으니 순수회화의 열정은 장욱진, 유영국, 권옥연, 이대원 등의 유명 화가를 배출한, 오늘의 경복고인 경성제2고보 명성에 값하는 노릇으로 외부에 비치기도 했다

   그의 그림 체질은 특히 6.25 전쟁을 맞아 불타기시작했다. 남침 때 피난을 못 갔지만 동안 덕분에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았음은 천만 다행이었다. 정릉 근처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몰래 시내의 동정을 살폈다. 여기저기에 나딩굴던 주검을 만나 그 참상을 열심히 소묘했고, 이 종군미술은 나중에 일본사람들이 알아주어 단행본으로 나왔다(김성환,『조선전쟁 스케치』, 도쿄, 2007). 이때의 작품성이 나중에 그가 즐겨 그린 판자집, 지게꾼 등 절대가난시절의 도시풍물을 기억하는 풍속화풍으로 이어졌다.

   절대가난의 시절에 그는 소년가장으로 천덕꾸러기 처지이던 만화계에서 투신했다. 그리하여 시사만화가로 입신발신하는 사이, 신문사 간부의 권력 아부성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윗사람 말 안 듣는 사람이라 욕했고, 만화의 저작권을 주장하자 돈만 밝히는 사람이란 뒷말도 예사로 들었다.

   그런 사이로 만화의 사회적 위상은 만화영화로, 이어 디지털 기반의 만화웹툰(webtoon)이란 성장산업으로 비약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이 사농공상의 전통 신분체계를 깨고 공상의 지위를 드높인 위인이었다면, 만화가 김성환은 고바우를 한자로 옮긴 큰 바위뜻인 고암이라던 당신 아호대로 그 정체성을 개과천선시켜 만화가 첨단산업으로 올라서는데 반석이 돼주었다.

 

김형국,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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